우리에겐 왜 친구가 없을까
2019년, 한국과 일본의 대립이 점차 뜨거워지는 모습이다. 양국 정상이 서로 던지는 비난이 심상치 않고 국민도 애국심을 불사르며 상품 불매운동이나 관광 회피 등의 집단적 움직임을 보일 정도다. 한·일 두 나라가 맞붙어 싸움을 벌이는데 국제 사회는 신기하리만큼 조용하다. 누군가 한쪽 편을 들거나 거들만도 한데 사실 상 침묵이다. 일본 정부가 불만을 가지는 한국 법원의 결정이나 일본이 한국에 취한 수출 제한 등은 두 나라에게 민감하고 중요하지만 타국이 볼 때는 그리 심각한 쟁점은 아닐 수 있다. 따라서 거리를 두고 강 건너 불구경 하는 태도로 방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입장에서는 서운하기 그지없다. 부당한 식민지배의 시기에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다 노예로 부려먹은 기업들에게 법원이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이고, 이에 일본 정부가 나서 자유 무역의 원칙을 무시하며 한국 경제를 공격하는 옹졸한 모습을 보인 사건이니 말이다.
특히 21세기는 민족 주권과 인권의 원칙에 따라 과거 식민주의의 폐해를 반성하는 시대다. 또 자유무역의 원칙은 어느 정도 보편 가치가 되었다. 한국 측은 이 두 쟁점에서 모두 정당성을 가진다. 일본이 궁색한 국제법의 논리를 들고 나올 때 한국은 훨씬 강력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논리를 내세워 국제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한국의 주장이 국제사회의 호응을 얻으려면 평소에 일관된 외교를 펼쳤어야 한다. 꾸준한 언행만이 신뢰를 쌓고 친구를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강대국이 이웃 약소국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주민과 영토 일부분을 부당하게 삼켜버린 일이다. 바로 백여년전 한반도가 일본에 당한 불행이다. 힘으로 법과 원칙을 짓밟고 반도를 합병했으니 말이다. 미국과 유럽연합, 일본이나 호주, 뉴질랜드 등 소위 서구 국가들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 경제 제재를 결정하여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도 이들에 대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손해가 누적되는 것은 러시아 측이다.
당시 한국은 정부 성명을 통해 러시아를 비난했지만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경제적 이익도 보호하면서 북핵 문제에서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러시아 주변국 가운데 한국처럼 제재에 불참한 국가는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등이다. 크림 반도라는 21세기 외교의 중대 쟁점에서 한국은 강대국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뿐 아니라 우리는 원칙보다는 단기적 국익을 빙자하여 눈치를 보는 습관이 뿌리 깊다. 진보나 보수 정권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한국의 친구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말을 되뇌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개인이건 나라건 영원하진 않아도 항상 친구도 있고 적도 있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를 잘 구분하는 것이 필요한 지혜다. 일반적으로 유유상종(類類相從), 비슷한 사람이나 국가가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한국과 가장 친해야 하는 나라는 대만이다. 지리적으로 같은 동아시아이고, 역사적으로 일본 식민지의 피해자이며, 문화적으로 유·불교의 바탕에 서구 근대를 받아들였다. 또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이며, 경제적으로 중국과 미국과 일본 사이에 낀 시장경제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 눈치 보느라 대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젠 관심도 없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서구라고 부르는 미국과 유럽, 호주, 뉴질랜드, 일본 등이 그 다음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공유하는 제도와 가치를 힘을 합쳐 수호하는 일을 마다해선 곤란하다. 그것이 설사 단기적인 손해를 끼치더라도 말이다. 한·일 대립에서 제3자가 침묵하는 것을 단순히 일본이 강대국이기 때문에 눈치를 본다고 해석하면 그야말로 우리의 나쁜 습관을 외부에 투영하는 것뿐이다. 국제 관계에도 국력 못지않게 작동하는 원칙과 가치의 세계가 존재하며 진정 가까운 친구를 만들 수도 있다. 망국의 역사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세계에 다가가는 일, 미래 우리 사회와 외교의 과제다.
내일신문 20190810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