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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7) 지중해의 천년 지배자 베네치아

    • 등록일
      2019-07-22
    • 조회수
      650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7)] 지중해의 천년 지배자 베네치아

바다에서 태어난 사자의 도시 (6/17)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대성당 조형물들.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의 형상이 보인다. / 사진:위키피디아

지금부터 3회에 걸쳐 전개될 부국굴기의 내용은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세 이탈리아 시대에 번영을 이뤘던 베네치아·제노바·피렌체 등 3개의 도시국가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롬바르드나 고트족 등 게르만 민족의 침략을 받았고 이슬람 세력이나 바이킹, 노르만족 등의 공격에도 노출됐다. 이런 정치·군사적 불안 속에서 경제 분야도 혼란의 시기를 거쳤다.

그러다가 10세기 무렵부터 중·북부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처럼 다수의 도시국가가 번창하면서 번영과 확장의 시대를 열어갔다. 이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는 베네치아·제노바·피렌체·밀라노 등을 꼽을 수 있다. 베네치아는 국가, 제노바는 자본, 피렌체는 금융과 산업을 주축으로 저마다 다른 특징을 앞세우면서 근·현대 자본주의의 요람을 만들어갔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브로델은 중세 이탈리아 자본주의를 연구하며 “베네치아에서는 국가가 전부였다면 제노바는 자본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해양제국을 형성했다. 지리적으로 베네치아는 자연스럽게 아드리아 해를 끼고 지중해 동부를 지배한 반면, 제노바는 티레 해를 품고 지중해 서부를 호령하는 세력이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해외 무역을 통해 거대한 제국을 형성한 두 도시국가와는 달리 피렌체는 로마 북쪽 내륙에 위치한 금융과 산업의 도시였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기원


▎베네치아는 바다와 늪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지금도 배가 주요 이동수단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현대 자본주의의 조국인 영국과 미국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이어 받은 뒤, 다시 산업혁명을 통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이처럼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자본주의 계보는 이베리아 반도와 네덜란드를 통해 영국과 미국으로까지 확장되면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만든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지도를 놓고 베네치아를 보면 반도의 동북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보인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바닷가에 위치한 일반적인 항구 도시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베네치아는 육지에 가깝게 위치한 석호(潟湖, laguna)에서 솟아난 도시라는 표현이 맞는다. 중세 이탈리아를 휩쓴 침략자인 롬바르드족을 피해 바다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든 도시가 베네치아다.

베네치아 인을 대표하는 강인한 성격은 바로 이런 자연적 조건에서 비롯된다. 육지에 성곽을 쌓고 도시와 시장을 발전시킨 대부분의 이탈리아 도시와 달리 베네치아는 바다의 모래와 늪 위에 널빤지를 깔아 물을 제거한 뒤, 흙과 돌로 메워 광장을 만들고 건물을 지어야 했다. 성곽 밖의 시골에서 식량을 공급하는 일반적인 도시와는 달리 베네치아는 공동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바다 넘어 육지에서 가져와야 했다. 심지어 석호 지역은 식수조차 부족해 집집마다 또는 동네마다 물탱크를 만들어 저장해야만 했다.

도시를 건설했던 초기부터 베네치아 인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선 생존이 불가능했다. 파벌을 타파하고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 공화국 제도를 만든 이유가 여기서 발견된다. 베네치아는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국가가 정책을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의 모델을 만들었다. 도시 건설을 위한 개간 사업부터 도시 계획, 해외 팽창, 무역 관리, 식민지 운영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권력을 집중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코 유해의 이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비잔틴이 이슬람 제국에 밀려 잃어버린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 인들이 기독교 성인의 유해를 지혜롭게 구출해 다시 기독교 땅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게다가 마르코는 원래 알렉산드리아에 오기에 앞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복음을 전파했기에 그의 유해를 베네치아에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베네치아 인들은 폈다. 이처럼 마르코 성인을 통해 베네치아는 지중해 기독교권의 정통성을 차지하게 됐고 마르코의 사자는 용맹스럽게 제국을 확장하는 기운을 제공했다.

베네치아 인들이 기독교 복음에서만 도시의 정체성을 찾은 건 아니다. 고대 로마의 전설에서 사랑의 신 비너스(Venus)가 바다에서 태어났듯 베네치아 역시 바다에서 솟아오른 신적인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바다와 베네치아는 운명적으로 얽힌 존재가 되었고 베네치아 인들은 운명을 따라 바다를 향해 나가는 일에 몰두했다.군주제와 과두제와 민주제의 결합

베네치아를 성공한 도시국가로 만든 1등 공신은 안정적인 정치체제다. 베네치아는 서서히 도시국가로 부상한 8세기부터 18세기 말 프랑스의 침략으로 무너질 때까지 천 년 동안 유럽을 대표하는 공화국의 모델이었다. 제노바가 정변으로 불안한 정치상황에 시달리고 피렌체가 공화국에서 군주 국가로 탈바꿈할 때에도 베네치아는 탄탄한 공화국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지중해와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는 맹주로 군림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베네치아는 공화국이었지만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는 엄격한 차별적 계급에 기초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계급사회의 가장 기층민으로는 노예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사 노동에 종사했다. 그 위에는 주변 지역이나 외국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 있었다.


중세 이탈리아를 21세기의 시각으로 재단해선 곤란하다. 베네치아는 봉건주의 군주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수천 명 규모의 대평의회 의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결정하는 집단적 지배 체제를 만든 선진적인 나라였다. 특히 베네치아처럼 국경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해외로 확장하는 국가에서 개방적으로 누구에게나 시민권을 주어졌다면, 정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대평의회와는 별도로 실질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를 이끄는 기구는 수백 명 정도의 소평의회(Minor Consiglio)였다. 소평의회는 상원(Signoria)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사실상 의회의 역할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베네치아를 대외적으로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물은 종신직 도제(Doge)였다. 13세기에 만들어진 도제 선출 방식은 무척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일부 가문이 연합해 선거 결과를 조작하거나 파벌을 형성하는 부작용을 차단하는 장치도 존재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우선 소수의 선거인단을 선출한 뒤 그 중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일부를 추린다. 그러고 나서 또 다시 이 과정을 3~4번 더 반복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선출된 도제는 어떤 파벌이나 집단이 지원하는 후보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베네치아의 국익을 대표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통합적인 인물일 거라는 계산이다.

베네치아의 정치는 이처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규정한 세 개의 다양한 원칙을 결합한 것이었다. 즉 도제는 1인 지배의 군주제를 대표하고, 소평의회는 소수 지배의 과두제 형식이며, 대평의회는 다수 지배의 민주제를 상징한다. 유럽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양한 정치 제도의 장점을 추려 만든 균형과 화합의 이상적 장치로 인식됐고 실제 500년 넘게 효율적으로 작동했다.중세의 모든 길은 베네치아로 통했다

베네치아는 시민의 일상 생활부터 도시의 건설까지, 그리고 해외 진출부터 무역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베네치아는 석호의 늪을 개간해 도시를 만들면서 국가가 물길을 계획하고 운하를 중심으로 하는 교통구조를 만들었다. 도시의 중심에 광장을 만들고 성당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 동네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기 위해 특정한 건축 스타일을 강요하기도 했다. 민간 귀족들은 정부가 정한 건축 스타일을 자의 반 타의 반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삼단노선이 지중해를 누비면서 전쟁과 무역을 지배했듯이 베네치아의 갤리(Galley)는 삼단노선에 큰 돛을 달아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제국의 주역이었다. 베네치아의 조선 산업 역시 국가가 관리하는 조선소(Arsenale)가 주도했고 민간업자들이 부수적 역할을 담당하는 구조였다. 해외 제국을 건설할 때도 베네치아는 정부가 관료를 파견해 무역 기지와 식민지를 담당하게 하는 중앙집권 방식이었다.

알렉산드리아 원정에서 마르코 유해를 가져온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초기 비잔틴 제국은 이교도인 이슬람 제국과의 무역을 금지했지만 베네치아나 제노바 상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이익을 찾아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로 활발히 움직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베네치아·제노바·피사 등 이탈리아 인들의 해군력이 강화됐고, 비잔틴 제국은 점차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자 비잔틴은 1082년 황제의 금인칙서(金印勅書, Golden bull)를 통해 베네치아 인들에게 해군 역할을 도맡게 했고 그 대가로 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베네치아 인들은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자신들의 구역을 할당 받았고, 비잔틴의 그리스 지역인 크레타·로도스 섬 등 요지에도 기지와 식민지를 만들 수 있었다. 또 십자군이 서아시아에 세운 국가에서도 무역을 독점하는 계약을 성공시켜 동방과 유럽을 잇는 중개 무역 분야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3세기가 되자 베네치아 인들은 흑해까지 진출해 크림반도, 카파 등지에서 몽골제국과 무역의 길을 열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바다는 질서가 없는 무법천지였다. 해군과 해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바다에서 무력을 통한 약탈 행위는 빈번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치아의 국가자본주의는 효력을 백분 발휘했다. 15세기 초 베네치아는 선박 3000척을 보유했는데 주요 무역 노선을 국가가 운영하는 함대를 통해 관리했다. 함대의 핵심은 정부가 운영하는 갤리선이 차지했고 상인들에게는 경매를 통해 무역에 참여하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 또 소규모 민간 갤리선이 공식 함대와 함께 움직일 수도 있었다. 거대한 함대를 통한 안전한 무역은 베네치아 상인집단에게는 공공재에 해당한 셈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베네치아가 자국을 무역 중심지로 만들고자 모든 상품은 일단 베네치아를 거치도록 강제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서아시아에서 온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면직물, 아프리카의 상아와 흑해의 노예는 베네치아에서 일단 관세를 지불한 다음에야 플랜더스 함대를 통해 북xt-decoration-style: initial; text-decoration-color: initial”>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


▎베네치아의 선단은 중세 지중해 무역을 독점한 패권자였다.

국가가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경향이 강했던 베네치아는 혁신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제노바나 피렌체에 뒤지는 측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 운영은 민간보다는 보수적 성격이 훨씬 강하게 반영되기 마련이다. 해외 무역과 관련해서 보험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은 베네치아가 아니고 제노바였다. 또 금융과 관련된 최초의 거대 회사를 출범시킨 것도 베네치아가 아닌 피렌체였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의 베네치아는 기준을 정하고 이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공공재 제공에 있어서는 그 어느 국가보다 앞섰다. 국가가 측량의 단위를 통일하고 항구에서 사고파는 상품을 측정하는 일을 관리함으로써 상거래 질서도 정착됐다. 또 14세기 중반에는 금화 두카토(Ducato)를 발행했는데 24캐럿의 금 3.5g이라는 기준을 공화국 말기까지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안정적인 통화 가치 덕분에 베네치아의 두카토는 100여 년 전에 출시된 피렌체의 플로린(Florin)을 누르고 지중해의 국제 통화로 활용됐다.

1500년을 전후로 베네치아는 유럽의 중심으로 우뚝 서 가장 풍요로운 선진 사회의 모델이 된다. 이때쯤 바다 위에 인간의 강한 의지와 오랜 노력으로 만든 인공적 도시도 거의 완성됐다. 특히 공화국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에 따라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스타일의 운하와 거리와 건물, 공공기관과 기념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전시장으로 떠오른 것이다.

베네치아는 지중해를 통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남유럽을 연결하는 거점 도시국가였다. 게다가 발칸반도의 슬라브 인들이나 알프스 너머 게르만 인들도 베네치아로 와서 물건을 사고팔면서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코스모폴리탄 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세기 런던이나 20세기 뉴욕이 도맡았던 세계 자본주의 중심의 역할을 16세기의 베네치아가 앞질러 이미 완성했던 셈이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역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게다가 수많은 법관과 공증인은 모든 거래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공인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유럽 문명권에서 제일 먼저 대학이 만들어진 곳이 11세기 이탈리아의 볼로냐라는 사실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또 베네치아에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길드를 형성했는데 13세기 10여 개에 불과하던 길드는 이후 142개까지 늘어나게 됐다. 특히 보석·수예·향수·장식품·모자·거울·신발·도기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수공업자들은 도시의 세련된 삶을 동반하는 사치품을 생산하는 일에 몰두했다.

일례로 베네치아의 유리 산업은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유리란 건물에서 자연의 빛을 마음껏 받아들이는 중요한 재료였고, 등이나 식기 등 문화적인 도시 생활을 위한 사치품에 해당했다. 당시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무라노 지역의 유리공장과 상점 방문은 필수 코스로 여겼다. 요즈음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는 아시아인들이 명품 매장에 반드시 들르는 것처럼.오토만 제국의 발흥이 불러온 쇠락


▎베네치아의 극장. 왕실과 귀족의 장르인 오페라를 대중화시켰다. / 사진:위키피디아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산업은 유럽이 지식사회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쇄업이었다. 금속활자를 통한 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였지만 이를 산업 차원으로 끌어 올린 것은 베네치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미 15세기에 수백 개의 인쇄소에서 활발히 책을 찍어내고 있었다. 책에 그림을 넣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고, 박리다매(薄利多賣)의 마케팅 전략을 활용했다. 1480년부터 1500년까지 20년 이상 베네치아는 100만권 이상의 책을 인쇄해 유럽에 유통시켰다. 이외에도 베네치아는 이탤릭 활자체를 발명했고, 라틴 알파벳이 아닌 그리스 알파벳으로도 책을 찍기 시작했으며, 음악 악보를 인쇄·판매하는 등 지식 산업을 개혁하는 선두 주자의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 1000년의 역사 가운데 9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힘찬 상승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베네치아 뿐 아니라 제노바·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국가들이 유럽의 부흥을 이끄는 기관차 역할을 담당했다. 인구가 늘어나고 무역이 활성화하면서 도시가 성장했고 결국에는 유럽이 이슬람 제국이나 인도·중국 등의 경제 수준을 따라가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주도한 유럽 성장의 패턴은 15세기부터 점차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 등이 이어 받으면서 현대까지 지속됐다. 다만 이때부터 이탈리아 도시들은 서서히 세계 경제의 주도권에서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높은 경제 수준과 도시 문화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명성은 지속되지만 첨단에서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능력은 조금씩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다.

베네치아에게 치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역사적 변화는 서아시아에서 오토만 제국의 부상이다. 베네치아는 유럽과 이슬람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에서 부를 축적해 발전한 제국이었다. 13~15세기 제노바가 베네치아의 앞마당이었던 지중해 동부에 들어와 경쟁을 벌이긴 했지만 흑해부터 소아시아·서아시아·북아프리카는 베네치아의 식민지와 무역기지로 가득 찬 영역이었다.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의 시대로


▎베네치아 천년 역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에 의해 마감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1453년 터키 오토만 세력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베네치아의 쇠락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지중해에서 베네치아는 점차 오토만 제국의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흑해는 물론 에게해에 갖고 있던 식민지를 오토만에게 빼앗기면서 베네치아는 좁은 아드리아 해로 몰렸고, 해양 제국은 점차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부터 시작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베네치아와 같은 중개 무역 대신 유럽인들은 세계를 누비며 남·동아시아까지 진출해 귀한 상품을 실어 와서 판매하는 직접 무역의 시대를 맞이한다. 베네치아가 오토만 제국과 지중해에서 힘겨운 경쟁을 하는 동안 포르투갈은 망망대해를 휘젓고 나가 인도의 화려한 면직물, 인도네시아의 후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가져와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였기 때문에 부국으로 성장하기가 수월했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성장한 베네치아·피렌체·제노바 등의 인구는 10만 명을 넘는 규모였다. 당시 런던이나 쾰른 등 북유럽의 도시들이 3~4만의 인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탈리아의 인구 자원이 얼마나 풍족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베네치아는 또 공화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통해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이는 지중해를 지배하는 제국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16세기부터 유럽에서는 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 등 더 큰 규모의 영토국가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본주의는 인구가 많은 도시 국가에서 발전했지만 민족주의는 영토에 기초한 왕국에서 융성하기 때문이다. 영토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의 규모는 무기의 발전과 함께 점점 확산됐고 이런 복잡한 대규모의 경쟁체제에서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국가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시국가의 집합체였던 이탈리아 중·북부가 중세와 르네상스의 유럽을 주도하는 중심이었다면 16세기부터는 강한 군대를 가진 영토국가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등장한 셈이다. 그 결과 1797년, 1000년의 공화국 베네치아의 역사는 제노바의 식민지였던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군을 이끌고 침공해 오면서 마침내 막을 내렸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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