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6)] 대륙제국과 해안왕국의 양 날개, 인도
“육로와 해로를 통해 6개 대륙으로 침투한다”(5/17)
▎촐라 왕국의 라자라자 1세가 1010년 힌두교의 신 시바에게 바치려고 남인도 탄자부르에 세운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왕국의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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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인도는 미래의 경제 세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40년 동안 경제대국으로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인도 또한 1980년대부터 경제 발전이 궤도에 오른 덕분이다. 인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현재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은 14억 명인 중국이며 그 다음이 인도로 13억 명이다. 하지만 출산율을 비교해 보면 중국은 1.6명에 불과해 고령화가 빨리 진행되고 있는 반면, 인도는 2.2명 수준으로 젊은 층도 두텁고 절대 인구도 곧 중국을 추월할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와 중국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두 나라 모두 하나의 대륙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 두 나라와 국토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 정도인데 인구를 보면 미국 3억 명, 러시아 1억4000만 명에 불과하다. 또한 중국과 인도는 모두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긴 역사를 자랑하며 뿌리 깊은 문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중국의 한어(漢語)와 유불선(儒佛仙) 문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듯이 인도의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는 남아시아 세계를 지배하는 지주(支柱)다.
물론 인도와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중국은 진시황의 통일 이후 한 나라로 권력이 집중되는 상태를 유지했지만 인도는 권력이 항상 다양하게 분산된 체제였다. 중국은 한나라(B.C.206~A.D.220)부터 1912년 청나라가 막을 내리기까지 2000여 년 간 대부분 통일 왕조였지만 인도는 한 번도 전국을 통합하는 정치 체제를 경험하지 못했다. 19~20세기 영국의 식민지 시기에도 수많은 왕국과 정치 단위가 존재했고, 1947년 독립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스리랑카·네팔·부탄·방글라데시 등 여러 나라로 분리됐다.
흔히 인도하면 막연하게 인도라는 특정 국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역사를 살펴보면 인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형성했고, 현재는 다수의 국가로 구성된 집합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부국굴기의 풍요로운 경제라는 관점에서 인도는 중국,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 함께 줄곧 유라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존재해 왔다. 테레사 수녀가 빈민운동을 펼쳤던 인도, 19~20세기 빈곤의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인도의 이미지를 잠시 접어두고, 화려하고 부유했던 과거의 인도로 여행을 떠나보자.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살펴보면 지구 한가운데 삼각형 모양의 인도가 쉽게 눈에 띈다. 인도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유럽 가운데쯤에 위치하는데 인도양이라는 대양의 중심에 불쑥 튀어나온 듯 보이는 땅이다. 아라비아에서 중국까지 가는 바닷길에서 인도는 중심 고리인 셈이다.
인도의 지리는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인도는 유라시아 대륙의 한 부분이지만 사실 히말라야와 힌두쿠시 산맥 등으로 어느 정도 분리·고립된 모습이다. 산맥 너머 지역과 교류나 침략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 쉽게 통일될 정도는 아니다. 인도의 북부는 두 개의 큰 강인 인더스와 갠지스를 중심으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면서 거대한 공간을 형성한다. 중국에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위치한 중원이 문명의 중심이었듯이 인도에서도 인더스·갠지스 평야는 문명과 제국의 발판이었다.
삼각형 모양의 인도 남부는 데칸고원이 지배하는 특수한 지형이다. 다수의 강이 동쪽 고원에서 발원해 서쪽 코로만델 연안으로 흐르면서 벵골 만의 바다와 만나는 형국이다. 북쪽부터 마하나디, 고다바리, 크리슈나, 펜네르, 코베리 강 들이 코로만델 연안으로 흘러가고 나르마다와 타피 강은 동쪽 말라바르 연안을 통해 아라비아 만으로 향한다. 말라바르 연안은 이슬람 세계를 바라보고, 코로만델 연안은 동남아를 향한 문이라고 할 만하다.
장기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인도 경제를 연구한 티르탄카 로이(Tirthankar Roy)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세계 경제에서 인도]라는 저서에서 ‘대륙제국’과 ‘해안왕국’의 정치·경제를 구분했다. 인도 역사에서 유명했던 거대한 제국은 예외 없이 대륙 내부에 중심을 둔 세력이었다. 고대의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4~2세기)이나 굽타 제국(4~6세기), 중세의 델리 술탄 제국(13~16세기)이나 근세의 무굴 제국(16~18세기)은 기본으로 인더스·갠지스 평야를 발판으로 삼았다. 이들은 농업 중심의 군사제국이었고, 농산품에 대한 징세를 통해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해안왕국은 지리적으로 내륙에서 벗어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했다. 인도는 인도양의 중심에 머리를 불쑥 내밀고 있는데 대양에는 몬순(monsoon, 여름과 겨울에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부는 바람)이라 불리는 계절풍이 강하게 불어 해양 운송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조건을 가졌다. 폭풍으로 항해에 수반되는 위험도 컸지만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일정하니 예측 가능성이 높아 해운이 발전했던 것이다.
로이 교수에 따르면 인도에서 배를 통한 물류 비용은 육지의 수레 비용보다 2~3배나 저렴했다. 육지로 운송할 경우 길이 험해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소에 직접 물건을 실어 캐러밴(caravan) 운송을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수레보다 비용이 2~3배나 더 들었다. 결국 배를 사용하는 것보다 육지로 산을 넘어 물건을 운반하려면 4~9배의 비용이 들었다는 의미다. itial; text-decoration-color: initial” />
길고도 화려한 인도의 역사에서 부국의 모델로 삼을 만한 사례나 시기를 꼽아내기는 쉽지 않다. 인도의 역사에서 대륙 제국은 화려한 궁궐과 사원을 짓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권력을 통해 농촌의 부를 착취한 결과다. 막스 베버가 구분했던 다양한 자본주의 가운데 무력으로 부를 약탈하는 정치적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반면 해안 왕국들은 수공업을 통해 상품을 만들어 수출했고, 해운을 발전시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상업자본주의 유형에 가깝다.
중세에 인도 남부 코베리 강 유역에서 출범한 촐라 왕국(850~1279)은 점차 주변으로 세력을 넓혔고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와 몰디브까지 점령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말라카와 수마트라, 자바 등 동남아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물론 이때 제국이라는 개념은 19~20세기처럼 해외 영토와 주민을 직접 지배하는 체제는 아니었다. 정치 지배보다는 자국의 종교·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인도양의 왕자’ 촐라(Chola) 왕국
역사학에서는 촐라 해양제국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다. 한편에서는 촐라 제국이 무력을 통해 스리랑카나 몰디브, 동남아 지역을 약탈했던 세력이라고 본다. 바다를 통해 먼 지역에 진출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륙의 제국과 다르지 않은 속성을 가졌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약탈의 성격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무역을 통해 자국 상인들의 부(富)의 축적을 장려하고 세수(稅收)를 늘리려는 동기 역시 강했다고 주장한다.
촐라 제국의 성격을 드러내는 몇 가지 지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제국의 번성기에 인도양을 통한 국제 해양무역이 그 어느 때보다 왕성했다는 점이다. 10세기를 중심으로 송나라가 경제적 부를 누리면서 대대적인 무역에 나섰고 이슬람 세계 역시 활발한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국제 교류에 몰입했다.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촐라 제국이 약탈과 무리한 징세로 일관했다면 동서양을 잇는 해양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촐라 제국은 동서양 무역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무력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기보다는 개방성을 가진 무역체제로 부를 획득하려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상인들이 인도를 통과해 중국까지 무역망을 확장시켰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인도에서 도시화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인도 역사에서 첫 번째 도시화는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 이뤄졌고, 두 번째 도시화는 갠지스 강변으로까지 도시 문화가 확장된 시기에 일어났다. 그 다음으로 세 번째 도시화는 중세에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진행됐다. 400; color: rgb(51,51,51); font-style: normal; orphans: 2; widows: 2; letter-spacing: normal; text-indent: 0px; font-variant-ligatures: normal; font-variant-caps: normal; -webkit-text-stroke-width: 0px; text-decoration-style: initial; text-decoration-color: initial” />
중세 인도의 분산된 해안왕국의 주요 도시에서 상인은 사회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집단이다. 이들이야말로 중세 세계 무역의 역군이라 할 수 있는데 인도에서 아라비아와 동남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이 상인들은 원래의 거점 도시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컨대 다양한 사원을 짓는데 경제적으로 기여했고 이 사실을 돌에 새겨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상인 길드는 일명 ‘아야볼루(Ayyavolu)의 500 귀인’이라 불린다. 아야볼루는 찰루키아(Chalukya) 왕조의 내륙 도시였는데 이곳 출신 상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신이나 문화,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수백 개의 석조 기록으로 남겼다. 그 가운데 1055년의 기록은 이들의 개척자 정신을 잘 표현했다.
“진실·순수·선행·예의·겸양·조심 등의 수많은 좋은 자질을 갖춘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 다양한 나라를 떠돌기 위해 태어났다. 지구는 배낭이고 뱀은 가방 줄이며, 보따리는 비밀 주머니이고 지평선은 빛이다 … 그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6개 대륙의 각 지역으로 침투한다. 커다란 코끼리와 살찐 말, 큰 사파이어와 월장석(月長石)·진주·루비·다이아몬드 … 카르다몸·정향·샌들·사향·사프란 그리고 다른 향료와 약품을 갖고.”
사업에 필요한 다양한 자질이나 세계적 떠돌이가 가지는 적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록이다. 게다가 당시 거래하던 상품의 명단도 흥미롭다. 실제 말은 인도가 아라비아로부터 수입하는 주요 상품이었고, 코끼리의 상아는 아프리카에서 수입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은 도자기와 비단을 수출했고 동남아는 다양한 향신료를 통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세계를 무대로 삼는 아야볼루 상인들이 낭만으로 유명하다면, 비슷한 시기 마니그라맘 상인 공동체의 기록은 다문화적 성격으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들은 동판(銅版)에 비문을 새겨 남겼는데 콜람(Kollam) 항구에서 거래하기 위해 해당 지역 정치권력과 합의한 조건을 타밀어·아랍어·히브리어·페르시아어 등 4개 언어로 적어놓기까지 하였다. 이 동판은 아직도 인도 남부 케랄라주(州)의 시리아계 기독교 공동체가 보관하고 있다.
▎라자라자 2세가 다라수람에 건설한 에라바테스와라 사원의 조각들은 촐라 왕국의 문명 발달을 보여주는 증거다. /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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