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과 대한민국 리트머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악화일로다. 이들은 경제 분야에서 무역에 대한 막대한 특별 관세를 경쟁적으로 부과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한편, 화웨이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무역에서 과학기술이나 국가안보의 영역으로 갈등을 확대하는 모습이다. 두 강대국의 힘겨루기는 그들만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에게도 편을 가르는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혈맹으로 불리는 미국과의 오랜 역사적 동맹, 그리고 근접성으로 경제 의존도가 심각한 중국과의 관계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진퇴양난이다.
이처럼 급박한 때일수록 단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긴 역사와 구조의 눈으로 사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수잔 스트레인지 교수는 1980년대 ‘구조적 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국제정치를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화두는 미국 패권의 쇠퇴론이었다. 1970년대부터 미국 국력이 약해져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계의 혼란이 초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스트레인지는 미국 쇠퇴론은 단기적 사건과 현상에만 집착한 착시현상이라며 미국은 여전히 강력하고 굳건한 구조적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사람들이 대개 주목하는 것은 관계 속에 드러나는 권력이다. 갑과 을이 한바탕 싸움이 붙었는데 누가 상대방을 때려눕히는가는 모든 구경꾼의 관심사다. 이런 권력은 ‘관계적 권력’이라고 부른다. 갑의 덩치가 크면 굳이 싸우지 않더라도 왜소한 을에게 소리쳐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 반면 구조적 권력은 게임의 규칙을 정할 수 있는 힘이다. 갑은 몸으로 싸움을 잘할지 몰라도 논리와 언변에 뛰어난 을이 송사(訟事)를 벌이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구조적 권력이란 몸싸움과 송사, 가위바위보와 달리기 등 승부를 가르는 게임을 선택하고 규칙을 강제하는 힘이라고 보면 쉽다.
스트레인지는 1988년 출판된 <국가와 시장>이라는 역작에서 세계정치경제를 구성하는 4대 구조를 구분했다. 안보, 생산, 금융,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게임의 틀을 형성한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2차적으로 보완적 역할을 하는 교통, 무역, 에너지, 복지의 부수 구조를 덧붙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1980년대까지 미국이 여전히 주요 구조에서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스트레인지의 진단은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은 엄살을 피울 필요가 없으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국 세력의 약화를 걱정하기보다는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국제적 제도와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국가와 시장> 이후 30여년이 지났다. 그 사이 중국은 급격한 성장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특히 2013년 구매력평가(PPP)기준으로 중국은 미국의 총생산을 앞질렀다. 중국은 엄청난 무역흑자를 통해 외화를 잔뜩 끌어 모은 뒤 미국 국채를 사들였고, 중국의 대학과 연구소는 과학기술 분야에 놀라운 투자를 통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 군사력은 경제력만큼이나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시진핑의 일대일로 계획은 세계에 중국 중심의 교통, 무역, 에너지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야심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세계정치경제의 구조적 권력을 획득하거나 미국을 위협한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여전히 미국과 그 이전의 서구 패권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정치경제의 질서 속에서 세를 빠르게 성장시켜 갈 뿐이다. 안보, 생산, 금융, 지식 등 4대 구조에서 중국은 그 동안 덩치를 키웠을지 몰라도 게임의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영역은 없다.
앞으로 중국이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해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은 물론 세계 각지 다양한 국가의 신뢰와 호응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공자의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즉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정치가 설 수 없다는 원칙은 국제사회에도 곧바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국가들이 공감하고 믿어 따르지 않는다면 중국 중심의 새로운 권력 구조는 요원하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대한민국은 미래 중국 패권의 리트머스다.
조홍식(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