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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시사매거진]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4)] 음료, 입안을 가득 채운 자본주의

    • 등록일
      2021-04-06
    • 조회수
      381

무엇을 마시느냐가 세상을 바꾸다

 

카카오·커피·차·설탕 둘러싼 무역은 유럽발 자본주의 확장의 시발점
20세기는 콜라·과일주스가 패권, 최근엔 다시 순수한 물(水)로 회귀

▎18세기 이집트 카이로의 커피숍. 처음에 이슬람 신비주의자들이 애용하던 커피는 이제 대중적 음료가 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자본주의는 인간의 입속에서 성장해왔다. 예컨대 후추는 아시아와 유럽의 원거리 무역을 이끈 동력이자 세계시장을 통합한 향신료였다. 유럽에서 무역 자본이 축적하게 한 자본주의의 양념이었다. 요리의 영역에서 후추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음료 분야는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상징이 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본주의가 서유럽을 중심으로 서서히 부상하는 기간에 초콜릿, 커피, 차 등 3대 음료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이후 19세기부터 등장한 콜라와 같은 소다 음료수는 먼저 미국을 점령한 뒤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음료와 자본주의 발전의 밀접한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음료는 요리보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 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인류에게 음료를 통한 수분 섭취는 필수적이지만 마시는 방법이나 내용물은 다양하다. 일례로 갈증을 느낄 때 맹물을 마실 수도 있고, 차나 커피를 즐길 수도 있으며, 과일 주스나 뜨거운 국물을 먹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음료는 재료도 섭취법도 다양하다는 개방성 덕분에 소비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인간이 문명의 길로 들어서기 이전에 수분을 흡수하는 방식은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맑고 깨끗한 자연의 물을 마시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이 시작되면서 등장한 수분 섭취 방법은 크게 술과 국 두 종류다. 국은 화식(火食)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음식과 물을 동시에 섭취하는 매우 효율적인 문명의 지혜다.

 

레스토랑이라는 프랑스어는 건강 곰탕이라는 뜻이다. 유럽 문명도 자본주의 발달 전에는 음식 재료를 물에 넣고 끓여서 먹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국을 끓이는 것은 물과 재료를 모두 소독하는 현명한 조리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화는 모든 분야에서 분업화의 진행으로 특징지어진다. 음식도 근대의 태동과 함께 음(飮)과 식(食)으로 나뉘어 서서히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즉, 음과 식을 섞어 놓은 국에서 탈피해 포크로 요리 한 입 먹고 잔으로 음료 한 모금 마시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유럽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은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이 큰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비며 신기한 상품들을 유럽 시장에 공급하는 무역을 통해 이뤄졌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험난한 대양을 건너 무역을 하는 상품은 높은 가치를 지녀야 했고 대중화도 가능한 상품이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요리에 사용하는 향신료는 적절한 무역 상품이었다. 또 따뜻한 음료를 만드는 재료인 카카오와 커피, 그리고 차가 유럽 무역의 대표적 상품으로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다. 이들 상품은 원산지가 각각 아메리카, 아라비아, 중국 등 이국적인 이미지를 보일 뿐 아니라 음료의 재료였기 때문에 고가품에 속하는 상품이었다. 요리한 뒤 비싼 향신료를 뿌리듯 물을 끓여 고가의 재료만 조금 첨가하면 새로운 상품으로 탄생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진출로 유럽에 제일 먼저 전해진 것은 카카오다. 카카오 콩은 균질적인 모양이었기 때문에 인디언 사회에서는 화폐로 사용됐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값비싼 카카오를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 먹었다. 주로 과일이나 옥수수, 버섯 등과 함께 먹었고 특히 매운 고추와 섞어 먹곤 했는데 매콤하고 씁쓸한 맛의 음식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고추의 유럽 진출 실패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유럽인들은 매운맛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카카오가 유럽 시장에서 판로를 찾게 된 것은 멕시코 지역의 한 수녀원에서 카카오를 설탕과 버무려 달콤하게 만든 이후라고 전해진다. 수녀원의 미식 실험 덕분에 오늘날 인류가 달콤한 초콜릿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 기관에서 열심히 간식을 개발한 덕분에 자본주의 상인들도 카카오를 유럽에 수출하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고추 빼고 설탕 첨가, 달콤한 초콜릿 열풍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카를로스 5세는 궁정 귀족들에게 카카오를 따뜻한 물에 섞어 맛보게 했는데 쓴맛 때문에 초기에는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7세기가 되면 스페인에서 프랑스, 이탈리아나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에 이르기까지 달콤하고 따뜻한 초콜릿 음료가 전파된다. 쓴 카카오는 그 자체로는 인기가 없었는데 가공 상품인 단맛의 초콜릿이 귀족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18세기 유럽 음료 시장에서 초콜릿은 커피나 차보다 2~3배 정도 비쌌기 때문에 대중화에는 실패했다. 초콜릿이 세계 자본주의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 19세기에 음료에서 벗어나 고체의 간식으로 돌변하면서부터다. 스위스는 19세기 초콜릿 산업에서 급속하게 부상했다. 특히 쉬샤르, 린트, 토블러, 네슬레 등의 브랜드들이 경쟁적으로 고체 밀크 초콜릿을 어린이 간식으로 개발해 대중화를 이끌었다.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초콜릿은 군인들에게도 유용한 식량으로 전파됐고 미군을 통해 세계 각지에 퍼져 나갔다. 초콜릿이 인기를 끌면서 카카오의 재배지도 아메리카에서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로 넓어졌다.

 

 

정신 수양의 음료, 커피


▎독일 라이프치히의 커피숍 입구 조각. 커피숍은 정치토론의 공간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커피는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데 버터 형식의 고체로 만들어 먹었기에 음식에 가까웠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카카오를 먹던 방식과 비슷했다.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아라비아반도의 예멘 지역으로 전해졌고 그곳으로부터 이슬람 문명권으로 확산했다. 아라비아에서 커피는 볶은 뒤 갈아서 끓는 물에 넣는 방식이었다. 커피는 카페인의 작용으로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따라서 정신 수양을 하는 이슬람 신비주의자 수피(soufis)들은 밤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커피를 복용하곤 했다. 수녀들이 초콜릿을 개발했다면 이슬람의 수피들이 커피 음료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봉사한 셈이다. 기도를 위해 마시는 각성 음료에 대해 이슬람 안에서는 허용 여부를 놓고 논쟁이 붙었는데 이때부터는 일반인들도 커피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15세기 이슬람의 수도 메카나 국제적 대도시 카이로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전문 공간들이 생겨난다. 16세기가 되면 이슬람 세계에서 급부상한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도 카페들이 개점한다. 다음 세기인 17세기에는 유럽에도 커피를 즐기는 문화가 전해지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카페가 등장한다. 지중해 국가인 이탈리아는 커피가 유럽에 도입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커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터를 사용했다. 끓는 물을 커피 가루 위에 내려 먹고 찌꺼기는 필터에 남도록 하는 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커피 제조 방식이다. 이탈리아는 또한 카페를 화려하게 장식해 모임과 사교의 장소로 발전시켰다. 영국에서도 커피하우스들이 17세기에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는 장소라 해서 한동안 폐쇄된 적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실내에 자유롭게 모여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정치를 토론하는 공적 공간이 처음으로 제공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카페가 본격적으로 발달해 사회 제도로 자리 잡은 곳은 프랑스다. 특히 프랑스 수도 파리의 경우, 1720년 이미 380개의 카페가 영업하고 있었고, 18세기 말에는 그 수가 600개에 달한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정신을 잠들게 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를 카페에서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커피라는 음료는 프랑스에서 지식이나 예술, 그리고 혁명과 긴밀한 역사적 연결고리를 맺게 되는 것이다. 커피는 또 귀족이나 부호, 지식인의 음료일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적 음료로 자리매김했다. 이미 1727년 악성 바흐(J.S.Bach)는 커피에 지나친 열정을 가진 딸의 버릇을 고쳐보려는 아버지를 주제로 커피 칸타타를 작곡할 정도였다. 다시 말해 독일의 라이프치히와 같은 도시까지 젊은이들 사이에서 커피의 유행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커피에 관한 세계적인 유행은 21세기까지 계속돼 지금도 미국과 중국은 커피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구 14억의 거대한 중국 시장을 놓고 미국의 세계적 공룡기업 스타벅스와 중국 현지 브랜드인 러킨(Luckin, 瑞幸) 커피가 다투고 있다. 2020년 중국에 4200개의 매장을 가진 스타벅스를 러킨이 추월해 4500여 개의 매장을 보유하게 됐다.

 

 

두 개의 전쟁 도화선이 된 차(茶)


▎요한 조파니의 ‘햄튼 하우스의 정원: 차를 마시는 데이비드 가릭 부부.’ 차는 미국 독립전쟁과 중국 아편전쟁의 원인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커피가 현대에 자본주의적 시장 전쟁을 초래했다면 차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두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미국에서 독립전쟁을 촉발한 1773년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는 식민지 미국의 차 수입과 관련된 분쟁이 그 원인이었다. 영국 정부는 동인도주식회사에 차에 대한 관세 특혜를 주면서 미국 시장 진출을 쉽게 만들어 줬는데 이 정책이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티 파티, 즉 ‘차 잔치’는 21세기에도 미국 정치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저항 운동의 의미를 띄게 됐다.

 

차 무역은 1840년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차는 18세기 영국 해외 무역에서 독보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718년부터 동인도주식회사는 모든 선박에 최대한 많은 차를 실어 영국으로 가져오라고 명했다. 실제 1760~1797년 사이 영국 동인도주식회사의 화물 가운데 80%를 차지할 정도로 차는 영국 해외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반면 세계시장에 거의 독점적으로 차를 공급하는 중국과의 무역에서 영국 상품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영국이 차를 확보하기 위해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금·은을 사용하거나 식민지 인도에서 확보할 수 있는 아편과 같은 마약을 활용할 수 있었다.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은 결국 중국으로부터 차를 손쉽게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음료인 커피와 사회 문화로서 카페가 뿌리내린 곳이 대표적으로 프랑스라면 차는 영국에서 문화적 입지를 다지면서 민족 음료로 부상했다. 차에 관한 문화가 영국에서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동인도주식회사는 활발한 광고 캠페인을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금주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임으로써 음료 소비를 술에서 차로 유도했다. ‘티 타임’이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듯 영국에서 차를 마시는 일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정착했고 영국의 차 소비량은 19세기 초반 1만2000t에서 1880년대 8만9000t으로 폭증했다. 커피가 유럽에 도달하기 전 아랍 문명에서 발달했듯 차는 중국 문화의 정수에 속한다. 특히 7~9세기 당나라 시기에 차는 중국 전국에 차관(茶館)이 생길 정도로 보편화, 대중화됐다. 하지만 차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은 커피와 마찬가지로 유럽 문명의 필터를 거친 뒤다.

 

영국은 중국의 차를 영국 문화로 흡수해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선봉장 역할을 담당했다. 생산의 측면에서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기반으로 차 재배를 촉진했다. 1870년대는 영국에서 중국 차가 50% 비중을 차지했지만 1900년이 되면 인도산이 90%에 달해 거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다. 소비 측면에서도 지중해 지역에 차 문화를 주도적으로 확산시킨 나라는 영국이다. 특히 북아프리카 지역에 녹차를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장본인은 영국 상인들이었다.

 

설탕은 중세에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12~13세기 서남아시아 원정에서 십자군은 설탕 맛을 들였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설탕을 유럽에 전파했다. 유럽에서는 시칠리아 섬이나 스페인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설탕은 워낙 귀했기 때문에 약품으로 취급됐고, 음식에는 아주 조금씩만 첨가하는 향신료에 속했다. 유럽인들의 세계 진출이 활발해지던 15세기부터 설탕은 유럽 자본주의 발전에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는다. 해외 진출에 선두를 달리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서양의 따뜻한 기후의 섬들을 식민지 삼아 사탕수수 재배에 돌입했다. 마데이라나 카나리아 제도, 상투메 등 아열대 또는 열대 지역에 식민지를 만들더니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도 사탕수수를 재배해 초기에 주요 산업으로 키웠다.

 

영국과 프랑스가 사탕수수 재배를 촉진하면서 카리브 지역의 작은 섬들은 유럽 자본주의의 실험 농장으로 떠올랐다. 유럽의 자본과 아메리카의 기후와 농토,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 노동이 결합해 사탕수수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브라질도 사탕수수 재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시드니 민츠의 고전적 연구 [설탕과 권력]에서 볼 수 있듯이 설탕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발전의 전형인 모델이다. 아랍 지역으로부터 수입하던 고가의 작물을 유럽인들이 점차 직접 대량 생산함으로써 수요가 공급을 초래하는 단계로 시작한다. 생산이 늘어난 다음에는 역으로 생산이 소비를 자극하는 단계가 이어진다. 설탕과 3대 식민 음료의 만남은 설탕의 소비를 대폭 증가시켰다. 앞서 봤듯이 카카오는 설탕과 조합해 초콜릿으로 발전했다. 커피와 차는 설탕을 넣음으로써 매력적인 음료로 새롭게 태어났다. 설탕의 높은 가격이 생산을 자극하다가,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낮아지면서 다시 대량 소비를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전형적 발전 양식이 설탕을 통해 완성된 셈이다.

 

 

차와 설탕의 시너지


▎영국의 카리브 식민지 앤티가 섬의 사탕수수 농장. / 사진:위키피디아

 

근대 자본주의의 조국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은 전 국민을 단맛에 길들인 대표적인 나라다. 동인도주식회사가 중국으로부터 도입한 차에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한 설탕을 듬뿍 타 마시면서 영국의 민족 음료가 탄생했다. 티 타임에는 차와 함께 설탕이 가득 담긴 파이나 케이크를 간식으로 먹으면서 영국인들의 설탕 소비는 대폭 늘어났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 재료로는 럼(Rhum)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럼주를 영국 정부가 해군에 보급함으로써 음료를 통한 군산복합체가 일찍이 만들어졌다. 나폴레옹이 영국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영국이 해상봉쇄 전략을 펼쳐 사탕수수 수입이 어려워지자 프랑스는 사탕무를 대신 심어 키우기 시작했다. 실제 사탕무를 통한 설탕 생산기술은 17세기에 이미 알려졌지만, 사탕수수 재배업자들의 로비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공급업자들의 영향력으로 자유로운 경쟁이 막히는 일은 다반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이 되면 설탕은 영국과 미국에서 식단의 중요한 영양 공급원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노동계급에서 가장(家長)은 구하기 어려운 고기 소비를 거의 독점했고 여성과 아동은 단맛의 차를 통해 열량을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설탕 소비는 1인당 40kg에 달하고, 미국은 30kg까지 늘어났다. 프랑스나 독일이 15kg 정도를 소비했으니 자본주의 본고장의 단맛 선호 수준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차와 설탕이 융합돼 만들어진 영국과 미국의 달콤한 음료 소비습관은 21세기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시원한 탄산음료는 따뜻하게 마시는 초콜릿, 커피, 차의 계보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물을 끓여 마시는 따뜻한 음료에 비해 찬 음료의 발전은 제한적이었다. 위생 상태를 확보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차갑게 마시는 음료의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는 레모네이드다. 13~14세기 이집트 카이로에선 카타르미자트(qatarmizat)라고 불리는 레모네이드를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 아랍인들은 따뜻한 커피와 시원한 레몬에이드를 모두 유럽에 전달해 준 셈이다. 그들은 또 장미 향 나는 물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레모네이드가 프랑스에서도 인기를 끌자 루이 14세는 레몬에이드 회사에 판매 독점권을 내주면서 국가가 음료 사업 관리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레모네이드 통을 등에 짊어진 판매원들은 파리 시내를 누비며 음료수를 팔았다.

 

 

소다수의 발명, 지구촌 점령한 콜라


▎1888년 코카콜라 시음권. 이후 콜라는 자본주의의 상징이 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이슬람 문명에서 서유럽으로 전해진 시원한 음료의 전통은 18세기 말 탄산음료로 한 단계 진화한다. 맥주에서 우연히 주변의 물통으로 가스가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 영국 리즈의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다년간의 연구 끝에 물에다 가스를 주입하는 방법을 개발해 왕립협회에서 발표했다. 그러자 독일 출신의 보석상 야콥 슈웨프(Schweppe)는 영국 런던으로 와서 슈웹스(Schweppes)라는 음료 회사를 차렸다. 물에 갖은 향신료를 섞은 뒤 가스를 투입해 제작된 탄산음료를 탄생시킨 것이다. 19세기에는 탄산음료가 다양한 종류의 실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진토닉 칵테일을 만들 때 사용하는 토닉 워터는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풍토병을 방지하기 위해 키니네 성분을 탄산 물에 투입한 결과다.

 

20세기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부상하는 코카콜라 또한 실제 프랑스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1863년 페루에서 수입한 코카 잎을 보르도 포도주에 섞어 탄산을 주입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당들이 한때 즐겨 마시던 포도주와 탄산음료를 섞은 ‘드라큘라 주’가 코카콜라의 기원인 셈이다. 프랑스의 코카 포도주는 미국에 와서 무(無)알코올 음료로 돌변한다. 1886년 미국 애틀랜타에는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약사 존 펨버튼(John Pemberton)은 코카 포도주에서 술 성분을 빼고 코카콜라라는 음료로 변형시켜 시장에 내놓았다. 알코올 성분이 빠지면서 이를 대신한 것은 설탕을 잔뜩 넣은 단맛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펩시콜라가 부상하면서 코카와 펩시 사이에는 세계시장을 놓고 대전이 벌어지게 됐다. 콜라만큼 세계인의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으면서 지구촌을 점령해 버린 음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상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똑같은 공식을 사용해 만든 완벽하게 인위적인 검은 색의 톡 쏘는 음료수가 유리나 깡통으로 만든 일정한 용기에 담겨 모든 대륙의 산골 마을 가게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생수 바(Bar)의 등장

 

물론 똑같은 상품을 소비한다고 다양한 인류 문화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문화에 따라서 상품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콜라는 무척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1980년 남아프리카의 영화 ‘부시맨’(The Gods Must Be Crazy)은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두고 아프리카 부시맨 부족이 ‘신들의 식기’라고 생각하면서 벌어지는 재미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콜라라는 음료를 아예 모르는 원시적 삶의 부족까진 아니더라도 똑같은 음료의 소비 방식은 사회마다 다르다. 19세기 미국에서 등장한 소다 샘(soda fountain)이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듯 콜라는 대량 소비의 대상이다. 용기가 큰 것은 물론 패스트푸드점에선 무한 리필이 가능한 곳도 많다. 19세기 영국의 대중은 달고 따뜻한 차로 허기를 달랬지만 20세기 미국의 대중은 넘치는 소다수 소비로 비만의 문제를 얻게 됐다.

 

같은 서양이라도 유럽의 음료 소비 방식은 미국과 완전히 다르다. 미국인들은 식사하면서 단맛의 차나 커피, 탄산음료를 함께 마시곤 한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식사할 때는 물이나 술을 마시지 단맛의 음료수는 피한다. 짠맛의 음식과 단맛의 음료를 섞어 먹지 않는다는 습관 때문이다. 콜라와 함께 미국이 세계에 퍼뜨린 음료 습관 가운데 하나는 과일주스 소비다. 심각한 건강 문제를 초래하는 소다수와 달리 과일주스는 비타민이 함유돼 건강에 좋다는 인식으로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확산 일로에 있다. 소비 방식도 공장의 대량 생산에서 차츰 소규모로 신선하게 직접 짜 마시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 경향은 순수한 물로의 회귀 현상이다. 건강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술의 소비가 줄어들고 단맛의 소다수를 피하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이 생체의 자연적 균형을 되찾아준다는 광고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의 생수 브랜드 에비앙의 경우 알프스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천연수가 건강에 좋은 것은 물론 아이들 성장에 특히 도움을 준다는 이미지를 퍼뜨렸다. 어린이를 키우는 가정에서 열심히 생수를 사서 분유를 타는 모습은 서유럽에 빠르게 확산했다. 21세기가 되면 우유보다 물값이 비싸지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지구 반대편 중국의 부자들이 유럽의 물을 공수(空輸)해 마시는 초현실적 현상들이 발생한다. 파리에는 다양한 지역과 브랜드의 물을 파는 생수 바가 생기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의 음료 소비 방식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특히 생수나 주스의 경우 재활용이 가능한 유리보다 대부분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깨끗하고 건강한 음료를 추구할수록 지구의 지하수가 고갈되면서 자연이 쓰레기로 뒤덮이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됐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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