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공동의 삶 영유 고민 / 소수에 대한 다수 배려로 ‘융합’
한 나라에서 침략자와 원주민,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화해하고 융합해 공동의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것일까. 21세기 뉴질랜드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천혜의 자연을 가진 남태평양의 뉴질랜드는 지구에서 인간이 가장 늦게 진입한 공간 가운데 하나다.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이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디딘 것도 13세기 말이니 말이다. 마오리라 불리는 이들은 이 섬나라를 아오테아로아 즉 ‘하얀 구름이 길게 드리운 나라’라고 불렀다.
유럽 사람들이 15, 16세기 세계를 ‘발견’한다며 바다를 누빌 때도 지리적으로 먼 마오리의 나라는 침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1642년 네덜란드의 아벌 타스만이란 탐험가가 이 지역을 항해하며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 ‘새로운 질랜드’라 불렀고, 1769년이 돼서야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많은 남태평양 섬과 함께 뉴질랜드를 유럽인에게 개방한 셈이다.
1840년 영국은 해군을 파견해 뉴질랜드 마오리 부족과 불평등 식민조약을 체결했다. 거대한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통상을 개방한 시기와 비슷한 때가 돼서야 뉴질랜드는 영국의 제국에 편입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메리카나 호주에서 영국 식민세력이 원주민을 짐승처럼 마구 사냥했던 것에 반해 뉴질랜드에서는 조약에 근거해 마오리 사람을 영국의 신민(臣民)으로 대해야 했다.
이후 19, 20세기 뉴질랜드의 역사는 영국 제국주의와 유럽인의 유입으로 마오리 원주민 삶의 공간이 점령당하고 파괴되는 일의 반복이었다. 여러 차례 마오리족의 저항과 반란이 일어났지만 식민세력의 지배력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유럽인 인구는 늘어나는데 유입된 질병이 강타한 마오리족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뉴질랜드는 새로운 미래를 위해 유럽인과 마오리의 역사적 화합을 꾸준히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는 1987년부터 영어와 함께 마오리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마오리 가운데 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문화적 양보이자 정책적 결단이다.
또한 70만의 마오리인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유럽인과의 혼혈이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국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 가운데 이 정도로 원주민과 인종적 융합이 이뤄진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뉴질랜드의 일상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유럽인에서 혼혈, 마오리로 연결되는 인종적 스펙트럼은 무척 자연스러워 외모만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뉴질랜드로 이주한 유럽인들의 진보적 태도도 화해에 한몫을 담당했다. 이들은 1893년 세계 최초로 모든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할 정도로 개방적인 사고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구름의 나라 뉴질랜드에서 침략자와 원주민의 화해가 가능했던 것은 결국 소수에 대한 다수의 배려다. 뒤늦게 도착해 지배자로 약탈에 동참했지만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지난 40여 년간 배려하고 양보하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한 것이다. 뉴질랜드 국가대표 럭비 팀 ‘올 블랙스’가 게임 전에 보여주는 하카 춤과 노래는 원주민의 토속 관습을 모든 국민이 계승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화해와 융합을 위한 사회의 노력을 상징한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